혹시 작년 한 해 동안 미국에 가장 많은 자본을 투입한 국가가 어디인지 알고 계십니까? 놀랍게도 전통의 강자인 일본이나 유럽의 경제 대국들을 제치고 대한민국이 1위를 차지했습니다. 우리 기업들은 조지아주의 광활한 대지에 배터리 공장을 짓고, 텍사스의 뜨거운 햇살 아래 반도체 라인을 세우며 수백조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거대한 투자의 결실을 맺어야 할 결정적인 순간, 우리는 예상치 못한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돈은 가는데 ‘사람’이 가지 못하는, 이른바 ‘K-투자의 역설’이 발생한 것입니다.
돈은 풀렸는데 길은 막혔다: 왜 ‘E4 비자’인가?
최근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제인협회, 한국무역협회 등 경제6단체가 공동 성명을 내고 미 의회에 ‘한국 동반자 법안(Partner with Korea Act)’의 신속한 통과를 촉구한 배경에는 절박한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현재 우리 기업들은 미국 현지에 공장을 완공하고도 이를 운영할 숙련된 엔지니어를 제때 파견하지 못해 발을 동구르고 있습니다.
“자본의 투입이 하드웨어를 만든다면, 전문 인력의 투입은 그 하드웨어에 영혼을 불어넣는 과정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기업들은 영혼 없는 공장만을 지키고 있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현재 한국인 전문가들이 미국에서 일하기 위해 주로 이용하는 비자는 전문직 취업비자인 ‘H-1B’입니다. 하지만 이 비자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추첨 방식(Lottery)으로 운영됩니다. 연간 8만 5,000건이라는 한정된 쿼터를 두고 인도의 수많은 IT 인력들과 전쟁 같은 경쟁을 벌여야 합니다. 당장 공장 가동에 필요한 핵심 기술자 10명을 보내려 해도, 운이 나쁘면 단 한 명도 비자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합니다. 경제6단체가 요구하는 ‘E4 비자’ 신설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인 전문가만을 위한 연간 1만 5,000개의 별도 쿼터를 확보하자는 것이 핵심입니다.

숫자로 보는 위기: 대미 투자의 규모와 인력 격차
우리 기업들이 미국에 약속한 투자 규모는 가히 압도적입니다. 삼성전자의 테일러 반도체 공장, 현대차의 조지아 전기차 메타플랜트, 그리고 SK온과 LG에너지솔루션의 수많은 배터리 합작 공장들까지 합치면 그 액수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래 표를 통해 현재의 불균형 상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 항목 | 현황 및 내용 | 비고 (영향) |
|---|---|---|
| 대미 투자 순위 | 세계 1위 (2023년 기준) | 미국 내 일자리 창출 기여도 최상 |
| 전문직 비자 현황 | 별도 쿼터 없음 (H-1B 경쟁) | 인력 수급의 불확실성 증대 |
| E4 비자 요구안 | 연간 15,000개 전용 쿼터 | 숙련 공정 인력의 안정적 공급 |
| 경쟁국 사례 | 호주(E3), 캐나다·멕시코(TN), 싱가포르(H1B1) | 한국 기업의 상대적 역차별 발생 |
위 표에서 보듯, 미국과 FTA를 체결한 국가 중 상당수는 이미 자국민을 위한 전용 취업비자 쿼터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호주는 연간 1만 5,000개의 E3 비자를, 싱가포르는 연간 5,400개의 H1B1 비자를 보장받습니다. 반면, 미국에 가장 많은 돈을 쓰고 가장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한국은 여전히 ‘추첨 운’에 기대를 걸어야 하는 불합리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수출 전선에 켜진 빨간불, 왜 이번 달이 골든타임인가?
경제단체들이 ‘이번 달 내 통과’를 강력히 외치는 이유는 미국 정치권의 시계가 매우 촉박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미 의회는 제118대 회기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곧 다가올 11월 대선과 연말 휴회기를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법안을 심의하고 통과시킬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만약 이번 회기를 넘기게 되면 ‘한국 동반자 법안’은 자동 폐기되며, 내년 초 새 의회가 구성된 뒤 처음부터 다시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이 시간의 지체는 단순한 행정적 손실이 아닙니다. 우리 기업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치명적인 리스크로 다가옵니다:
- 초기 가동 수율(Yield) 저하: 반도체와 배터리 공정은 미세한 공정 관리가 생명입니다. 국내 본사의 숙련된 엔지니어가 현지에 상주하며 공정을 잡지 못하면 수율 확보에 실패하고, 이는 고스란히 천문학적인 적자로 이어집니다.
- 기술 유출 방어 취약: 현지 채용 인력에만 의존할 경우, 핵심 공정 기술이 외부로 유출될 리스크가 커집니다. 우리 기술을 아는 핵심 인력이 현장을 관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 공급망 주도권 상실: 미국 정부의 IRA(인플레이션 감축법)와 칩스법(CHIPS Act)의 혜택을 받기 위해 서둘러 현지 생산을 시작해야 하는데, 인력 문제로 가동이 늦어지면 보조금 수령에도 차질이 생깁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 ‘프렌드쇼어링’의 민낯
미국은 자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위해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우방국 간 공급망 구축)’을 강조해 왔습니다. 한국은 미국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경제적 파트너로서 그 부름에 가장 적극적으로 화답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비자 문제는 ‘프렌드’로서의 대우라고 하기엔 너무나 박합니다.
미국 입장에서도 한국 전문가들의 유입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이들은 미국의 첨단 산업 생태계를 강화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유지하며, 세금을 납부하는 고급 인력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E4 비자 통과는 한국만을 위한 특혜가 아니라 미국 경제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공동의 이익’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하지만 미국 정치권 내의 복잡한 사정이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이민 정책 전반에 대한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립, 불법 이민자 문제와 결부된 정치적 민감성 등이 ‘한국 전문직 비자’라는 지극히 경제적인 사안조차 정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는 정부와 민간의 전방위적 ‘라스트 스퍼트’가 필요할 때
경제6단체의 이번 건의는 우리 기업들이 처한 한계 상황을 알리는 마지막 구조 신호(SOS)와 같습니다. 이제 공은 미국 의회로 넘어갔지만, 우리 정부 역시 외교력을 총동원해 미 정치권을 압박하고 설득해야 합니다.
단순히 “도와달라”는 호소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한국 기업의 투자가 멈추거나 지연될 경우, 해당 지역(조지아, 텍사스 등)의 경제에 어떤 타격이 올지, 그리고 그것이 대선 국면에서 해당 지역 표심에 어떤 영향을 줄지를 명확히 짚어주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한 성의를 보였습니다. 수백조 원의 투자와 수만 개의 일자리라는 성적표를 들고 이제는 당당히 우리의 권리를 요구해야 합니다. ‘사람’이 갈 수 없는 투자는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습니다. 이번 달, 미 의회의 현명한 결단이 대한민국 경제의 미래, 그리고 한미 경제 동맹의 진정한 완성점을 찍어주기를 간절히 기대해 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비행기 티켓 대신 비자 추첨 결과를 기다리며 가슴 졸이고 있을 우리 엔지니어들과, 공장 건설 현장에서 인력 부족으로 밤잠을 설치고 있을 기업 관계자들에게 이번 소식이 희망의 마침표가 되길 바랍니다. 경제 수석 에디터로서 필자 또한 이 중대한 법안의 처리 과정을 끝까지 예의주시하며 독자 여러분께 가장 빠른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